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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 하나 떨어질 때 석양은 저물고
잎 하나 떨어질 때 석양은 저물고
  • 이영준 기자
  • 승인 2019.11.14 16: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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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재발견 – 양평 용문산
양평군의 상징 용문사 은행나무. 수령 1100여년이라는 은행나무에서는 언제 봐도 장엄한 서기가 뿜어 나온다. 지난 세월동안 용문산을 휩쓸고 간 숱한 시련에도 나무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兩水里)는 ‘두물머리’라는 순우리말로도 이제 잘 알려져 있다. 그 말뜻처럼 두물머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서로 만나 합쳐지는 곳이다. 두물머리에서 섞인 물줄기는 더 큰 물인 한강이 되어 서울로 흘러들고 서해로 빠져나가는데, 단순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물이려니 하고 접어두기엔 그 당연한 자연현상에 너무나 큰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다.

예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물살이 비교적 거센 북한강을 남성으로 여겨 ‘수물’이라고 하고, 그에 비해 잔잔한 남한강을 여성에 빗대 ‘암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금강산에서 시작한 것이 북한강이요, 태백 검룡소에서 시작한 것이 남한강이니, 언뜻 두물머리에 일렁이는 물결은 고향도 다르고 살아온 곳도 다른 남녀가 성숙해 만나 몸 부비는 로맨스 같다.

두 물이 하나 되어 만든 강은 그래서 한강이요, 그 말뜻은 ‘큰 강’이다. 한강의 흐름이 곧 지금 우리의 얼과 역사를 이룬 근간이요, 민족의 대동맥이라는 데에는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두물머리에서 만나는 두 가지 물의 어울림은 단지 평일 오전 이곳에 발길 잦은 풋사랑들의 가벼운 시선으로 바라보기엔, 너무나 크고 진중한 무게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곧잘 두물머리의 모습을 시대에 빗대 말하곤 한다. 지난 한 세월을 지겹게 끌어온 분단의 시간들이 두물머리에서 섞이는 두 물처럼, 그리고 또 더욱 커져 도도히 흘러가는 그 모습처럼 우리의 앞날에 찬연히 펼쳐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다.

‘얼싸안아보자꾸나 어루만져보자꾸나 / 너는 북에서 나는 남에서 / 온갖 서러운 일 기막힌 짓 못된 꼴 / 다 겪으면서 예까지 흘러오지 않았느냐 / 내 살에 네 피를 섞고 / 네 뼈에 내 입김 불어넣으면 / 그 온갖 것 모두 빛이 되리니 / 춤추자꾸나 아침햇살에 몸 빛내면서’ 신경림의 시 ‘두물머리’ 중에서

용문산 정상이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철책에 둘러싸인 국가시설물로 인해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했던 정상은 1157m라는 숫자가 아니었다.

 

두물머리에서 고개를 들면 용문산(龍門山․1157m)이 눈에 들어온다. 그 높이로 치면 경기도에서 4번째이지만, 차치하고라도 주변 양평 고을에 이만한 준봉이 없어 산정에 올라서면 주변 산이 모두 발아래 있다. 그래서 용문산 오르는 길은 등(登) 용문이고만 싶은데, 산을 둘러 싼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다지 술렁술렁 물결 같은 것만은 아니다.

강원도 두로봉에서 뻗어 나온 한강기맥 줄기가 두물머리로 치달으며 사그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용쓰고 솟아오른 형상이라는 용문산, 그 정수리엔 여의주도 아닌 것이 꼭 그렇게 생긴 구슬 두 개 달려있다. 미군과 우리 군에서 설치한 레이더 기지다.

산정에 지금의 군부대가 들어선 건 한국전쟁이 끝나고부터라고 전해진다. 용문산에선 전쟁 때 이미 한바탕 전투를 겪은 바 있는데, 용문사 아래 가면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전적비에는 1951년 5월 국군 6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과 싸워 이겼다는 내용이 적혀있으며, 그 또한 한강을 두고 벌어졌던 지난한 인간사의 일부분일 뿐이다.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도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으르렁거렸다고 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서기 590년 단양에서 치명상을 입은 고구려 온달장군이 서울 아차산에 묻힌 까닭이 장마철 불어난 남한강 물길을 따라 수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남한강은 한때 고구려 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기록에 남아있는 건 신라의 영토에 관한 것 뿐이나 이곳이 예부터 치열한 격전지였다면, 용문사의 기원도 설명이 된다.

신라 진덕여왕 3년(649)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지배적인 이 절은, 신라와 고구려가 밀고 밀리던 시기 최전방에서 신라군의 용기를 북돋아주고 전장에서 스러져간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한 목적으로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문사는 으레 미래불인 미륵을 안치했을 것이며, 병사들에게 남한강은 도솔천의 의미가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 땅을 차지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듯 용문산을 둘러싸고 ‘입신출세’ 등용문하려고 했을까.

1908년, 일제가 양근군과 지평군을 통합해 생겨난 양평군은 남한강의 상류라는 지리적 위치 덕에 지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개발광풍을 비껴갈 수 있었다. 지금은 전국 제일의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는 고장으로 자리매김 했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의 이곳에서는 산자락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기름진 들판마다 넉넉한 양식이 생산됐을 것이다. 한강 유역의 경제적 성장은 곧 문화의 발전과 세력의 주도를 이뤘고, 그래서 이 일대를 손에 넣는 건 권력의 핵심을 거머쥐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평화로운 농촌마을로 남아있는 강과 산을 들춰보면 그 안엔 꼭꼭 숨은 상처가 있다. 가을이면 노란 용문사 은행나무에 마의 태자 눈물이 배 있는 것처럼. 지난 해 용문산 정상이 개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한동안 떠들썩했다. 허나 철책이 남아 있는 한 누구에게도 진정한 정상은 아니다. ‘오후 다섯 시 이후 출입통제’ 숨 몰아쉬며 오른 그곳에 내걸려있던 한 마디는 또 다시 이곳을 찾고 싶은 마음을 아예 사그라지게 했다.

우리가 염원했던 ‘등용문’의 정상이란 그 물리적 높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두물머리에서 만나는 서로 다른 두 강물의 어울림은 그래서 늘 그립다. 산을 내려오는 길, 어느 새 다리가 피로하다. 은행나무 발치에 몸을 누인다. 노란 은행잎은 하나 떨어질 때마다 석양은 매일 저문다. 강물은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