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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노즈 스피드 레코드-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혁신적인 것
[영화 리뷰] 노즈 스피드 레코드-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혁신적인 것
  • 곽정혜 기자
  • 승인 2019.12.20 1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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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58분 07초.

이 기록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지도 모른다. “마라톤 세계 최고기록이 깨졌나요?” 아니. 걱정 마시라. 마라톤에서도 탈인간급으로 여기는 ‘마의 2시간’ 장벽은 아직 공식적으로 굳건하다. 그럼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것은 요세미티 엘캡의 노즈(The Nose)를 오르는데 걸린 최단시간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외칠 것이다. “세상에! 그게 가능한가요?”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왔던 그 일이, 알렉스 호놀드(Alex Honnold)가 작정하고 달려든 순간 가능해졌다.

소리 없는 전쟁터, 노즈

‘암벽등반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엘캡에서도 가장 상징적이고 정통적인 루트로 손꼽히는 노즈는 그 길이가 3,000피트(약 930m)에 달한다. 1958년 워렌 하딩(Warren Harding)이 노즈를 초등할 때 40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얼마 후에 그의 라이벌인 로얄 로빈스(Royal Robbins)는 일주일 만에 이곳을 올랐다. 물론 이때는 엘캡을 자유등반으로 오른다는 개념이 없었기에 인공등반으로 올랐다. 이후 조금씩 기록이 단축되다가 1980년대에 피터 크로프트(Peter Croft)가 자유등반으로 노즈를 4시간 42분 만에 오르게 된다.

40일동안 등반해 노즈를 초등한 워렌 하딩
40일동안 등반해 노즈를 초등한 워렌 하딩
워렌 하딩의 기록을 7일로 단축시키며 노즈를 재등한 로얄 로빈스
워렌 하딩의 기록을 7일로 단축시키며 노즈를 재등한 로얄 로빈스

1990년대에 스피드 클라이밍의 선두주자인 한스 플로린(Hans Florine)이 2시간 48분 만에 오르면서 노즈는 소리 없는 전쟁터로 변해간다. 딘 포터(Dean Potter), 후버 형제(Huber brothers), 유지 히라야마(Yuji Hirayama) 등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클라이머들이 이 속도경쟁에 뛰어들어 분초를 다투게 된다. 여성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퀸 브랫(Quinn Brett), 리비 사우터(Libbie Sauter), 마이언 스미스-고뱃(Mayan Smith–Gobat) 등이 도전장을 내밀어 남성들과 각축을 벌였다.

이에 2012년 한스 플로린은 ‘당대 최고의 프리솔로 클라이머’로 각광받던 알렉스 호놀드에게 손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2시간 23분 46초라는 최단기록을 세웠다. 그러자 이제 모두가 더 이상의 시간단축은 어려울 거라고 여겼다.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녀석들이 요세미티 계곡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2017년 2시간 19분 44초만에 노즈를 등반 중인 브래드 고브라이트. 등반의 기본적인 안전수칙과는 거리가 멀다.
2017년 2시간 19분 44초만에 노즈를 등반 중인 브래드 고브라이트. 등반의 기본적인 안전수칙과는 거리가 멀다.

 

애송이들에게 참교육을 시켜주겠어!

2017년 10월 21일, 브래드 고브라이트(Brad Gobright)와 짐 레이놀즈(Jim Reynolds)는 한스와 알렉스의 기록을 4분 앞당긴 2시간 19분 44초에 노즈를 올랐다. 엘캡 정상에 오른 브래드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이 사실을 알렸고, 알렉스는 곧장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렇듯 훈훈한 결말인 듯 보였던 이 사건은, 또 다른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총성이 되었다.

브래드와 짐이 예견했듯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알렉스는 곧바로 자신의 절친이자 ‘화강암 마스터’로 명성이 드높은 토미 콜드웰(Tommy Caldwell)에게 연락한다. 두 아이의 아빠로 가정에 충실하고 있는데다, 영화 <던 월> 개봉과 책 출간기념 행사를 다니느라 등반에 목말라있던 토미 콜드웰. 게다가 알렉스의 제안에 언제나 “예스맨”이 되는 그가 이 제안을 놓칠 리가. 그렇게 두 사람은 노즈 속도등반 도장깨기에 나서게 된다.

필승 전략을 세우고 있는 토미 콜드웰과 알렉스 호놀드
필승 전략을 세우고 있는 토미 콜드웰과 알렉스 호놀드

 

필승전략을 세우려면 먼저 상대편의 전술부터 알아야 하는 법. 브래드와 짐의 등반영상을 분석하던 두 사람은 연신 헛웃음을 짓고 만다. 아무리 속도등반이라곤 해도 브래드와 짐의 등반엔 너무나 ‘구멍’이 많았던 것이다. 기초상식도 제대로 안 갖춰진데다 안전에 대해선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철저하게 빨리 오르는데 치중한 브래드와 짐의 모습을 본 알렉스는 ‘이 애송이들에게 제대로 된 등반을 보여주겠다’고 벼르게 된다.

서로의 손발을 맞춰본 두 번의 시도에서 알렉스와 토미는 4시간 30분 만에 노즈를 오른다. 보통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기록이지만, 알렉스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며 못마땅해 한다. 그리고 안전을 위한 확보물을 좀 더 줄여 몸을 가볍게 만들며 목표를 향한 고삐를 바짝 조인다. 그렇게 이어진 세 번째 시도에서 2시간 57분의 기록을 내고, 네 번째 시도에서는 토미가 30미터 넘게 추락하고 알렉스 또한 손가락을 다칠 정도로 컨디션이 흐트러졌음에도 불구하고 2시간 31분을 기록한다. 그리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다섯 번째 시도에서 2시간 25분으로 기록을 단축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노즈 최단속도 등반에 도전하는 날, 요세미티 계곡은 그들을 응원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토미의 가족들과 알렉스의 여자친구, 한스 플로린을 비롯한 동료들,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브래드와 짐. 본격적인 등반시즌을 맞아 각국에서 온 클라이머들이 노즈를 점령한 가운데, 알렉스와 토미는 그들 사이를 피해가며 2시간 10분 14초 만에 엘캡 정상을 밟아 왕좌를 되찾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알렉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좀 더 ‘완벽한 등반’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2시간 이내에 노즈를 올라 역사를 새로 쓰는 것.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노즈 옆에 있는 살라테(Salathe)라는 유명한 루트에서 두 명의 클라이머가 추락사하는 사고가 나면서 가족들의 불안은 커져간다. 알렉스와 토미 또한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 템포 쉬어가기로 결정, 노즈를 차근차근 다시 오르며 안전에 대한 점검을 꼼꼼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이 노즈에서 속도를 갱신한지 8일 만에, 1시간 58분 07초라는 기록을 세우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토미 콜드웰의 등반 장면
토미 콜드웰의 등반 장면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혁신적인 것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안전’이다. 알렉스 호놀드가 노즈 속도경쟁에 뛰어든 건 그의 타고난 호승심에 기인하기도 하겠지만, 브래드와 짐의 등반에 결여된 안전에 대해 상기시키고자 했던 이유도 있다.

노즈 속도경쟁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다. 자유등반(free climbing), 인공등반(aid climbing), 속임수(cheating – 볼트를 밟는다거나 퀵드로를 잡고 오르는 일 등) 모두 통용된다. 또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최소한의 확보장비를 가져가야 하고, 시간을 줄이기 위해 프렌드나 캠을 설치하는 횟수도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유명한 클라이머들도 치명적인 추락사고를 피해갈 수 없었다. 율리 스텍(Ueli Steck)도, 토마스 후버(Tomas Huber)도 추락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고, 한스 플로린도 추락해서 두 다리가 부러졌다. 그리고 퀸 브랫은 부트플레이크(Boot Flake) 꼭대기에서 30미터나 떨어진 뒤 간신히 구조되었지만, 하반신마비로 여생을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난다긴다 하는 클라이머들도 그랬는데, 하물며 등반경험이 일천한 두 클라이머들이야 말해 무엇 하리. 그들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계속 그렇게 무모한 등반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렉스는 몸소 보여주려고 했다. 선등자와 후등자간의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시간이 지체되더라도 꼭 필요한 곳에 확보를 하는 등 브래드와 짐의 눈에는 미련해 보일만큼 최대한 정도(正道)를 지키며 등반을 했던 것이다. 결국 세상모르고 날뛰는 망아지 같던 브래드는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알렉스에게 축하를 건넨다.

브래드 고브라이트(1988~2019)

 

브래드 고브라이트는 이후 프리솔로 클라이머로 전향하여 미국 내 클라이밍 사회에서 ‘다크호스’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역량이 채 꽃을 피우기도 전에 안타깝게 스러지고 만다. 지난 달, 멕시코 북부 엘 포트레로 치코(El Potrero Chico) 봉의 센데로 루미노소(Sendero Luminoso) 루트를 등반하던 중 추락사한 것. 하강 중 로프 끝에 매듭을 하지 않아 그대로 몸이 빠져나간, 초보적이고도 사소한 실수 때문이었다. 결국 그의 가장 큰 약점이었던 빈약한 기본기와 경험부족이 잠깐 찬란했던 봉오리마저 퇴색시키며 꽃을 가지째 꺾어버렸다.

역사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탄탄한 기본과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열정이라는 바탕이 있어야 기적처럼 꽃을 피우게 된다. 알렉스와 호놀드의 쾌거가 담긴 영화가 국내 관객들에게 선보이기도 전에 들려온 브래드의 비극적인 소식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혁신적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알렉스 호놀드와 토미 콜드웰에게 찬사를, 그리고 브래드 고브라이트에게 깊은 애도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