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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알피니스트'가 던지는 질문
영화 '알피니스트'가 던지는 질문
  • 오영훈 미국통신원
  • 승인 2020.02.10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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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 다큐멘터리’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KBS의 <영상앨범 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히말라야>? 요세미티 대암벽을 맨몸으로 오르는 <프리 솔로>?

‘다큐멘터리’가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라면 이들 모두는 기준 미달이다. 왜냐하면 산악 다큐는 대개 “수염과 함께 엮어서 이미지를 파는” 극일 뿐이고, 마치 프로스포츠가 중계방송에 의존하듯 등반 또한 “일거수일투족을 최대한 감동적으로 기록해주는” 카메라에 의존해 왔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전무후무한 산악영화 전문 감독이었던 고 임일진 감독(1969~2018)의 영화관이다.

 

<알피니스트 – 어느 카메라맨의 고백>(김민철·임일진 공동 연출)이 곧 개봉한다.

한국 산악 다큐멘터리로는 <길>(김석우 감독, 2008년),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박준기 감독, 2013) 등에 이은 보기 드문 개봉작이다. 그러나 <알피니스트>는 여러 면에서 기존 산악영화·다큐멘터리의 전형을 탈피하는 문제작이다. ‘고난 끝 승리’의 영웅주의나, ‘구조에 나서는 자/외면하는 자’ 따위의 이분법적 구도, 처절한 사투에 비장한 최후로 이어지는 추모극 등의 천편일률적 도식을 모두 벗어난다.

작품의 내용은 임 감독이 2009년부터 2013년 사이 네 번의 고산원정대에 촬영 대원으로 참여하여 기록한 영상과, 이를 돌아보는 임 감독 본인의 인터뷰가 주를 이룬다.

초점은 죽음을 무릅쓰는 산악인과 또 이를 담아내려는 카메라맨의 욕망이다. 전반부와 후반부에 각각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등반가들은 모두 실제 죽음을 맞음으로써 충격을 전해주는데, 그보다도 죽음 전후의 과정을 ‘내 몫의 약속’이라며 고스란히 영상으로 전달하는 카메라맨의 고뇌가 충격을 넘어 혼란스럽게 전달된다. 즉 <알피니스트>는 등반을 묘사하는 시선을 문제 삼음으로써 삶과 자아의 본질에 관해 탐색하는 깊이 있는 영화다.

영화의 전반부에는 세 원정대가 나온다. ‘한국 최초 7천 미터 급 산을 알파인스타일로 신루트 개척’하는 파키스탄의 스팬틱 등반과, 역시 알파인스타일로 초등에 도전하는 파키스탄 가셔브룸 5봉 등반, 이어 ‘36시간 만에 등정과 하산을 완료하는’ 네팔 촐라체 북벽 등반이다.

이를 모두 이끈 김형일 대장이 주된 관찰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영화가 보여주는 산악인들의 모습에서는 영웅적인 면모를 찾아보기 어렵다. 등반을 즐기기보다는 두려워한다. “해야 할 일이니까… 꼭지점을 찍어야 되니까” 억지로 고생을 참는다. 현지인과 다투기도 하고 등반을 상의하는 데에는 짜증 담긴 이견이 오간다. 반면 카메라 앞에서는 자세를 취하고 등반사에 박식한 척하며 상의를 벗어 몸매도 과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연출에 가담한다. 원정을 거듭하며 산악인과 카메라맨이 공모한 ‘보여주기’의 강도는 점점 커져만 간다.

 

극단으로 치달은 영웅주의는 등반을 무리한 이벤트로 바꾸어놓는다. 촐라체에서 두 명의 등반대는 꼭 36시간 만에 주검으로 돌아온다. 그런데도 중계하던 카메라는 끝까지 소임을 다한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일영 대원... 대원? 얀마 안 쳐다봐?” “됐어, 그만해.”

영웅을 그려내기로 되어 있던 카메라는 의미의 소멸 지점까지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소유자가 없어진 텐트 안의 소지품을 정리하는 손길의 주인공이 되어 영웅서사의 마지막을 완성한다. 그 손의 주인공이 마침내 오열을 터뜨리는 것으로.

고 임일진 감독
고 임일진 감독

허를 찌르는 영화의 반전은 여기부터다. 왜 카메라는, 임 감독은 본인이 오열을 터뜨리는 장면을 촬영했을까. 머리에 카메라를 매달고 스스로 촬영한 슬픔은 ‘진짜’인가. 영웅주의로 포장하는 ‘다큐’는 가짜고 대신 ‘진짜’ 영상이란 게 있을까.

언뜻 보면 한국 산악계에 뿌리 깊은 영웅주의를 비판하는 고발성 영화였나 싶었는데, 이는 영웅주의/순수주의, 삶/죽음의 도식을 넘어 진짜/가짜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후반부는 전혀 다른 산악인의 죽음을 보여준다.

에베레스트를 산소통 없이 도전하는 서성호다. “에베레스트가 나에게 어떤 어려움을 줄까”라 자문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산을 오르는 그에게서 연출된 가식적인 면모란 찾아볼 길 없다. 그러나 그도 마침내 사망하고 카메라는 이때도 마지막을 놓치지 않는다.

두 죽음을 나란히 회상하며 임 감독은 혼란에 빠진다. 피할 수 없는 질문은 이것이다. 왜 ‘순수’ 산악인의 최후는 ‘영웅주의’ 산악인의 최후와 다른 게 없나. 죽음이란 왜 누구에게나 똑같이 알 수 없는 것일까.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카메라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말할 수 있나. 영화 속 임일진은 서성호의 마지막을 이렇게 추념한다. “[서성호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을까?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자살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돌아가야 할 곳, 마침내는 가야 할 곳으로 간 것”이라고.

죽어간 산악인도 이를 기록한 카메라도 죽음의 심연 앞엔 말이 없다.

세상에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삶/죽음’의 이분법은 차라리 가짜다. 우리가 아는 죽음은 누군가가 그려낸 허상일 뿐이다. ‘순수’, ‘진짜’ 따위도 마찬가지다. 자아의 승리를 기대하지 않는 ‘순수 등반’, 연출을 의도하지 않은 ‘진짜 영상’ 따위란 허울일 뿐이다.

즉 임 감독은 스스로 순수하다고, 진짜를 촬영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학산악부 출신으로 영화보다 산을 먼저 접한 그는 “나도 ‘알피니스트’라 불리우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죽음들을 겪으며 영웅의 꿈을 체념한 듯 보이는 그는 “36시간 같은 거” 따위의 과도한 연출은 그만두고 “그냥 기계처럼 [촬영을] 해야되는 것 같아요”라며 구르자히말로 떠난다. “자기 안에 뭐가 있는지”는 “산에 가보면 안다”고 했다는 김창호 대장과 함께다.

김창호는 임일진의 오랜 지기이자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산악인이었다.

마지막 반전이 기다린다. 임일진은 김창호와 함께 구르자히말에서 최후를 맞는다.

즉 그들이 맞았다. 그들은 산에 감으로써 산에 어울리는 사람들이었음을 증명했고, 죽음과 함께 영웅으로 부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웅이 되고야 말 그들의 운명은 남은 우리에게만 알려졌다. 즉 삶/죽음의 이분법은 여전히 각자를 사는 우리—관객에게는 미궁으로 남았다. 우리의 운명이 무엇일지는 ‘가보아야만’ 알기 때문이다!

영화 속 임일진이 과연 ‘진짜’였는지도 역시 관객에게 미궁으로 남았다. 관객은 임일진이 ‘진짜 임일진’을 연기했는지—예를 들어 그의 눈물이 ‘진짜’였는지—를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진짜’ 눈물이란 무엇일까?).

생명과 자아의 신비는 90분으로 다 보여줄 수 없다는 사실을 전달함으로써 영화는 다큐멘터리로서의 소임을 완성한다. 언덕 너머 까만 점이 되어 사라지는 등반가를 지켜보며 장대한 오케스트라 곡으로 재탄생한 설악가가 흐르는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산악인은 온갖 이분법들의 허망함을 노래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알피니스트는 삶의 철저한 공허 앞에 온몸으로 그림을 그려 온 예술가들이다. 따라서 생애를 바쳐 산을 그려낸 임일진이 아니면 누가 알피니스트겠는가. 지독한 ‘영웅병’을 앓으면서도 철저히 카메라 뒤에서만 평생을 보낸 그를 기어코 카메라 앞에 앉힌 김민철 감독의 연출에 박수를 보낸다. 산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꼭 봐야 할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