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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피니스트 열전] 김형일- 나의 9000m
[알피니스트 열전] 김형일- 나의 9000m
  • 이영준 기자
  • 승인 2020.02.27 12: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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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피니스트-어느 카메라맨의 고백’에는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산악인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 기자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다시 공개한다. 김형일(1967~2011)과는 2009년 8월 만났다.-편집자 주

김형일은 지금까지 기자가 만나온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클라이머들과 비교해보면 등반을 특출하게 잘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인수봉이나 선운산, 토왕성폭에서 만날 수 있는 보통의 클라이머들처럼 바위를 오르다 팔꿈치가 까지고 콧물을 흘리며 빙벽을 넘어선다. 등반을 하고 내려오면 으레 땀 냄새 풀풀거리며 우이동이나 설악동 주점의 쪽탁자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그러다 대취하면 가끔 전봇대에 노상방뇨도 한 번씩 하는, 그런 인물이다.

그가 스팬틱에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얼굴이 구릿빛일 때 산꾼들 몇 명이서 노량진 난전 횟집에서 모였었다. “남들은 그런 위험한 데 가면 손가락, 발가락, 어떨 땐 목숨까지도 두고 오는데 당신은 무얼 두고 왔소?” 누군가 묻는 말에 그는 불콰해진 얼굴로 “나는 정신을 두고 왔다~ 허허허!”하며 웃어젖혔었다.

7000m급 산에서 수직고 2200m 거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6박7일간 오르고 내려왔다는 건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우리나라 알피니즘 역사에 획을 그은 일이다. 그것이 엄청난 노력의 산물이었건, 행운이 따랐던 것이건 마땅한 평가를 받아야 할 일임은 분명하다. 지난 7월 김형일은 민준영, 김팔봉 대원과 파키스탄 스팬틱(7027m) 북서벽에 ‘드림 2009’라는 이름의 신루트를 개척하고 나서 체중이 10kg나 빠졌다고 했다. 구구절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가 견디었을 곤란함들이 눈에 선하다.

귀국 후 며칠 뒤 만났던 그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고 말했었다. 보름쯤 지난 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도봉산 아래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처음보다는 몸집이 회복된 것 같았지만 여전히 근육이 흐물흐물해지는 고소에서의 후유증은 남아있는 듯했다.

원래 계획은 선인봉에 갈 생각이었다. 오랜 만에 같이 바위도 할 겸, 산꾼은 산에서 만나는 게 가장 좋다는 일념에 이것저것 장비를 꾸려 메고 갔는데, 정작 발목을 잡은 건 도저히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푹푹 쪄대는 폭염이었다.

“나는 영원히 형진이 형이다”

“바위는 안 되겠고 봉주한테 갑시다. 한동안 못 만나고 다녀와서 전화도 못했는데 겸사겸사….”

가만히 있어도 혓바닥이 늘어지는 상황에 그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만나러간다는 김봉주씨는 수락산 정상에서 막걸리 노점을 생업으로 하고 있는 산꾼으로, 김형일과는 알프스와 탈레이사가르 북벽 원정을 함께 다녀온 바 있었다. 마침 기자를 포함해 우리 셋은 서로의 집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동네 주민이기도 했기에 흔쾌히 수락산 내원암 입구로 차를 돌렸다. 산길을 오르다가 출근 중인 김봉주씨를 만났고, “먹을 만큼만 담으라”는 그의 말에 우린 배낭 가득 막걸리를 쑤셔 넣고 산을 오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산능선 나무그늘 아래서 오전부터 시작된 낮술은 결국 밤까지 이어졌다. 사실 별로 물어볼 말도 없어서 한동안 줄곧 막걸리만 마셔댔다.

“대체 산에 왜 갑니까?”

술병을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하던 김형일은 입을 열었다.

“항상 원정을 다녀오면 ‘내년에는 내가 산에 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인데, 주변에서는 이제 첨예한 등반을 하기에는 나이도 있고 하니 그만해야 하지 않나 하는 이야기도 많이 해요. 그런데 등반이라는 게 같이 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야지 폐가 되어서는 안 되거든요. 그래서 올해도 원정 준비하며 1월 1일부터 담배 끊었어요. 지금은 다시 피우지만….”

“아, 그러니까 산에 왜 가냐니까요?”

“그러니까…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 산을 통해서 얻은 게 많고, 극한등반을 통해 내 한계점에 부딪칠 때까지 한번 해보고 싶은 거죠. 산에 올랐을 때 마음이 편하고, 안 가면 답답하고, 미칠 것 같고…. 노인이 되고 힘이 없어도 아마 계속 갈 것 같아요. 이건 정해져 있는 운명이에요. 다시 태어나도 산에 가고 싶고요.”

우문에 ‘답답’이지만 이건 역시 산 사람의 숙명인가보다. 8848m를 오르고 나서도 있지도 않은 9000m쯤을 향해 끝없이 다시 오르고 싶은 욕구처럼. 얼마 전 타계한 리카르도 캐신은 말했다. 산악인은 시인이라고. 산에서 느끼는 감정, 그게 도무지 말로 다할 수 없는 유치한 표현일지라도, 산악인이 적은 말은 곧 시와 같은 거라고.

한동안 스머프 만화 속의 악당 ‘가가멜’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녔던 김형일은 언제나 툭툭 농담이나 던지며 좌중을 유쾌하게 하곤 하지만 그의 표정 속에 감추어진 그늘을 찾는 건 그와 술 몇 번 마셔본 이라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의 이름이 산동네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건 90년대 말쯤 부터. ‘형진이네 형’이라는 게 늘 그를 따라다니던 수식어였다. 그의 동생 김형진(1973~1998)씨는 98년 인도 탈레이 사가르 북벽에서 함께 등반 중이던 최승철, 신상만씨와 추락사했다. 그때까지 김형진씨는 우리 산동네에서 내로라할 만한 전위적인 클라이머 중 한사람이었다. 그래서 김형일에게는 동생의 사망 후에도 늘 그 후광이 비추곤 했다. 하지만 김형일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제가 형진이 형이지 아닌가요? 설령 제가 엄청난 등반을 해서 아무리 유명해져도 형진이 형이라는 건 변할 수 없는 거예요.”

김형일은 2남 1녀 중 첫째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던 여동생도 지난 2000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 이제 혼자만 남았다. 원정을 떠날 때면 어머니는 그가 돌아올 때까지 집안에 촛불을 꺼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전부터 저도 의정부 산악회에 들어서 리지도 하고 주말에 산에 다니기도 했는데, 사실 동생하고 바위한 적은 한두 번밖에 없어요. 그때 그저 직장 다니고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사고 나고 나서 언론에서 말했던 것들과 달리 그 셋의 명예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주위에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내가 등반을 더 열심히 해서 그들을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자, 나는 어떻게 돼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형진이가 가면서 저에게 좋은 길을 열어준 것 같습니다.”

김형일은 동생이 죽은 탈레이 사가르 북벽을 오르려는 시도를 두 번 했었으나 결국 정상에 가지는 못했었다.

“그땐 어렵게 원정을 꾸리다보니 조바심이 나고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이 앞서서 대원들을 다그치기도 했었어요. 나중에 경험이 쌓이다보니 생각의 폭이 좀 넓어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다시 도전해보고 싶은 산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가고 싶죠. 하지만 그게 ‘동생의 원수를 갚는다’ 이런 건 아니에요.”

“산에서 죽는다는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 없어요. 로체 샤르에 갔을 때 꿈에서 제 영정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되게 찝찝하기는 했지만 죽는다기보다는 오늘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등반을 하다보면 ‘고’와 ‘백’을 객관적으로 잘 판단해야 돼요. ‘반드시 가야돼’보다는 냉철하게 판단해서 힘들어도 넘어설 수 있는 상황인가 아닌가, 자신의 상태와 대원의 상태를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죠.”

“자기만의 알피니즘을 찾아야”

그는 이번 스팬틱 등반이 그런 면에서 최고의 팀워크와 능력이 발휘된 것이라고 자평했다. “히말라야 알파인 스타일이라는 게 해보니, 훈련과 팀워크만 잘 돼있으면 훨씬 더 유리한 방법 같아요. 주위에서 우리 등반이 이번에 고미영 사고 때문에 조금은 묻힌 것 같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많이 하는데, 사실 요즘은 저한테 ‘거벽등반이 대세’ 운운하는 것도 듣기에 거슬려요. 산 다니는 사람이 8000m만 할 수도 있고, 거벽만 할 수도 있고 서로의 등반에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저 14좌는 폄훼하고 고산거벽은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건 지난날 스포츠클라이밍이 산악계에서 저평가되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라고 봐요. 오히려 여러 사람들이 등반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고, 언론에서도 여러 등반에 대해 조명을 골고루 해주어야 등반 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성숙해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라, 아직 취한 게 아니었나. 아니면 촌철살인을 담아낸 취중진담인 것인가. 우리는 이미 산에서 내려와 계곡가 옻닭집으로 자리를 옮겨 소주병을 여러 개 쓰러트린 뒤였다.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뭡니까? 흔히들 하는 5개년 계획이나 이런 것도 있나요?”

“오르고 싶은 산이야 무궁무진하게 많지만, 아직 5.9도 다 못 끝냈는데 갑자기 5.11한다고 덤벼들 수 없잖아요. 그건 객기죠. 그런데 기회가 된다면 8000m급 알파인 스타일도 해보고 싶고, 올 겨울에는 네팔 촐라체 북벽이나 타우체 북벽에 마음 맞는 몇 명이서 가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앞으로 계속 산에 다닐 텐데 기록을 잘 남겨야겠다는 생각도 문득 드네요.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산에 가고 싶어도 이게 알피니즘 운운하는데 갇히면 안돼요. 나만의 알피니즘을 찾아야지. 그런 거 아닙니까?”

아아, 술이 깨고 있는 것일까.

“제목은 ‘나의 9000m’이런 걸로 하면 되겠네요. 8848보다 더 높은 나의 9000m.”

대리운전 기사를 기다리는 사이 ‘딱 일병만 더’를 외쳐댔던 우리들은 결국 기사 아저씨에게 딸꾹질을 해대며 김형일의 집 앞 호프집까지 데려다달라고 이야기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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