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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그해 겨울의 이야기
1876년 그해 겨울의 이야기
  • 마운틴저널
  • 승인 2020.03.20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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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블랑을 동계초등한 메리 이사벨라 스트라톤

1876년 1월 29일, 그랑뮬레 산장의 조용한 어둠을 가르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차가운 공기는 무겁게 느껴졌고, 그들의 등불에서 나온 빛줄기는 산안개 사이로 무딘 노란 빛을 던졌다. 바람이 크레바스와 불룩 튀어나온 얼음 위로 잔물결을 일으키며 부드럽게 웅성거렸다.

아마도 메리 이사벨라 스트라톤(1838~1918)은 그녀의 이전의 시도 때와 비교해 기온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온도계를 찾아다녔을 것이다. 1786년 여름 자크 발마와 미셀 가브리엘 파카르가 몽블랑을 처음 등반한 이후 수십 년간 아무도 아직 겨울에 그 정상에 서지 못했다.

독일 여성산악인 이네스 파페르트가 1876년 스트라톤의 몽블랑 동계초등을 재현하고 있다. 사진 Thomas Senf 

알피니스트 메리 머메리는 자신의 남편(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이 1895년에 쓴 『알프스와 코카서스에서의 등반(My Climbs in the Alps and Caucasus)』이라는 책의 한 장에서 그 시대 남성 등반가들의 공통된 태도를 회상했다.

“남성들의 생각은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여자는 가파른 얼음이나 가파른 바위에서 적합한 동료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여성들은 망원경을 통해 등반을 구경하거나 잡초가 많은 절벽에서 두 명의 건장한 가이드들에 의해 무척추동물처럼 끌어올려지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6년까지 여성들은 이미 몽블랑에서 시도되었던 중요한 동계등반 중 네 번이나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남녀불문하고 겨울철에 고산을 오른다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역사학자 로널드 클라크가 『알프스의 야사(An Eccentric in the Alps)』에서 썼듯이, “산정이 눈에 두껍게 덮여 있는 시기에 그곳을 오르는 것은 위험하기만 하며 즐거움이나 가치란 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속에서도 1876년 1월 초, 미국 여성 알피니스트 메타 브레보트(1825~1876)는 융프라우와 베터호른 동계 초등에 성공하고 몽블랑 또한 오르기 위해 시도했다. 그녀의 일행은 정상에서 600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도달했지만 블리자드가 몰아치는 가운데 캔버스 텐트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돌아서야 했다.

가이드들과 함께한 메타 브레보트. 초대 영국 여성산악회 회장이었던 루시 워커와 함께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산악인으로 꼽히는 브레보트는 최초로 바지를 입고 등산한 여성이다. 그녀는 마터호른과 라 메이쥬를 처음으로 오르는 것을 자신의 등반 목표로 꼽았지만 아쉽게도 그곳에 오르지는 못했다. 

 

스트라톤은 자신의 등반을 도와줄 샤모니 출신 가이드인 장 샬레와 실벵 코테를 고용하고 포터로 미셸 발마와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또 다른 한명을 고용했다.

그들이 그랑 플라토(Grand Plateau)의 가파른 능선을 터벅터벅 걸어가자 지평선에서 태양이 막 떠오르기 시작했다. 눈이 바스락거리며 발 밑에서 부서지는 동안 그들은 로프 없이 등반했으며 얼어붙은 표면에는 히든 크레바스들이 숨겨져 있었다. 이름 없는 포터 한명이 작은 비명을 지르며 크레바스로 사라졌고, 일행들은 곧 틈새에 빠진 그를 끌어냈다.

​그들은 계속 비탈을 따라 조금씩 올라갔다. 스트라톤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을 때 그녀는 포터 한명이 부상당해 눈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초췌하고 흐릿한 눈동자의 그는 금방 잠이 들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포터와 함께 다시 산장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고, 그는 다음 날 무사히 마을로 돌아갔다.

스트라톤의 등반 모습을 그린 석판화.

 

다음날, 산장에 남은 사람들은 이번에는 꼭 정상에 오르기로 결심하고 그랑뮬레 산장에서 해가 뜨기 전에 다시 출발했다.

공기는 맑았고, 달빛은 기류를 가르며 흩어졌다. 얼음 덩어리들은 돔 위에서 반짝였으며 거대한 커니스는 능선을 휘감고 있었다. 눈은 부드럽고 벨벳처럼 매끄러웠다.

그들이 첫 번째 오르막에 올라서자 산등성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눈이 흩날려 모래알처럼 뺨을 때렸다. 추위는 그들의 얇은 장갑과 가죽 등산화에 스며들어 손과 발을 마비시켰다. 스트라톤은 잠시 멈춰서 눈과 코냑을 섞어 손으로 힘차게 문지르곤 손끝에 계속 자극을 주었다.

스트라톤은 훗날 존 페이시 파라(주: 1857~1929, 영국의 군인이자 산악인, 영국산악회 회장 및 에베레스트 위원회 회원 역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 모두는 이것이 두 번째 시도가 아니었더라면 계속 등반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몽블랑 정상에 선 메리 이사벨라 스트라톤

샤모니에서 망원경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군중들은 하얀 정상에 스트라톤의 일행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탐색했다. 가이드 코테는 “우리는 정상에 오르기에 성공하거나 시도하다 죽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고,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산악인이자 저술가인 찰스 듀리에르에게 들려주었다. 찰스는 자신의 책 『르 몽블랑(Le Mont Blanc)』(1877)에서 “나는 정말로 마드모아젤 스트라톤이 정상에 오르기로 결심했다는 걸 믿었다”는 코테의 이야기를 실었다.

오후 3시가 되자 스트라톤과 두 명의 가이드, 발마가 정상에 섰다. 샤모니의 반대편 쿠르마이어 골짜기 아래로는 세상이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스트라톤은 『타임즈』에 “정상의 경치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웅장했다”고 썼다. 그녀는 “여름 시즌에 몽블랑을 세 번이나 올랐지만 1월 31일 이곳에 올라서야 그곳을 완벽히 보았다. 이탈리아 쪽의 엄청난 눈들이 산의 웅장함을 더했다”고 기록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길, 산 봉우리가 자줏빛과 금빛으로 불타올랐다. 그들은 다음날 샤모니로 돌아가기로 하고 산장에서 또 하룻밤을 보냈다. 산에서 내려온 그들의 앞에는 군중들이 모였고 환호가 이어졌다. 밴드는 의기양양한 음악을 연주했으며 광장에서는 불꽃놀이가 열렸다. 스트라톤이 호텔 앞에 모인 사람들의 무리를 헤치고 나아가자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장 샬레와 스트라톤. 두 사람은 결혼 이후 '샬레-스트라톤'이라는 성을 함께 썼다. 

그해 프랑스 산악회 연감에 실린 그들의 기사는 칭찬 일색이었다. 사보이 산악회의 보고서에는 “올해 이루어진 다른 모든 회원들의 초등반은 이사벨라 스트라톤의 탁월한 위업을 따라간 보잘 것 없는 걸음일 뿐”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사보이아 지역의 주도인 샹베리 지역을 다룬 등반에서도 “프랑스 산악회의 역사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업적”이라며 “무엇보다도 스트라톤의 용맹함에 가장 큰 영예가 있다”고 적었다.

그해 11월 스트라톤은 그녀의 가이드 장 샬레와 결혼했으며 두 사람은 ‘샬레-스트라톤’이라는 성을 함께 썼다. 그리고 그들의 파트너십은 다른 등반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로부터 한참이 흐른 뒤, 몽블랑에 대한 등반사를 되돌아보면서 듀리에르는 간단하지만 가슴 아픈 결론을 내렸다. “여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는 『Alpinist』 69호에 실린 파울라 라이트(Paula Wright)의 ‘1876: A Winter's Tale’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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